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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1주일/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 가?/배광하 신부
작성자 : 원근식   작성일 : 2016-11-26 조회수 : 3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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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마태오 24,37-44)



구세주 빨리오사91번

대림 시기

대림 시기는 ‘예수 성탄 대축일’ 전의 4주간을 말한다. ‘대림’(待臨)이라는 뜻은 오시기를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이 용어는 ‘도착’을 뜻하는 라틴 말 ‘아벤투스’(Adventus)를 번역한 것이다. 오실 분은 물론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그분은 이천 년 전에 이미 이 세상에 오셨던 분이시다. 교회는 전례를 통하여 그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을 해마다 되풀이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신비를 새롭게 기념하고자 하는 것이다.그러기에 대림 첫 주일에 한 해의 전례주년이 시작된다. 교회 달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니 올해 대림 시기에도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려야 한다.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열망하며 기다리던 그 마음으로 예수님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한편 대림 시기는 종말에 오실 예수님도 묵상하게 한다. 이 분위기는 대림 첫 주일부터 12월 16일까지의 전례에 많이 나타난다. 성경 말씀도 ‘깨어 기다리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12월 17일부터 성탄 전야인 12월 24일까지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렇듯 대림 시기는 예수님의 오심을 두 부분으로 묵상하게 한다.

대림 시기에는 사순 시기와 마찬가지로 ‘대영광송’을 노래하지 않는다. 그러나 ‘알렐루야’는 노래한다. 사순 시기는 회개와 보속이 강조되는 슬픔의 기간이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대림 시기는 기다림이 강조되는 희망의 기간이다.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께서 오시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알렐루야’를 노래하고 있다.

종말은 언제 올지 모른다. 예수님께서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다. 그러니 깨어 있어야 한다. 매일의 기도에 충실 하는 것이 깨어 있는 삶이다. 날마다 선행을 베풀고자 노력하는 것이 준비하는 삶이다. 예수님께서는, 도둑이 언제 올지 알면 대비하는 것처럼, 확실한 종말을 대비하며 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 가


1.그리운 기다림

제과점 빵이 귀하던 시절, 성탄 때면 성당에서 나누어주던 그 맛있던 빵이 얼마나 먹고 싶던지 다가올 성탄을 손꼽아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신학교 입학의 날을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고, 멋진 수단을 입고 싶어 착의식 날을 기다리던 때가 있었고, 사제로 수품 될 날을 고대하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인생은 어찌 보면 기다림의 연속된 삶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떠나간 자녀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승진될 날을 기다리며, 자식이 제대하여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식당에서는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며, 경제가 나아지기를 기다리고, 결혼할 날을 기다리며, 심지어 술안주 나오기를 기다리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립니다. 미사 시간을 기다리고, 병이 낫기를 기다립니다. 신앙도 기다림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수천 년 메시아께서 오시기를 기다렸고, 신약의 하느님 백성들은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하실 날을 기다립니다.

사실 우리네 삶에서 기다림이 아닌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우리가 이 지상에서 과연 무엇을 기다렸는가 하는 것이 심판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참다운 기다림은 두 손을 놓고 막연히 넋 놓음의 기다림이 아니라, 진정 내 전 존재를 투자할 가치의 존귀함 앞에 자신의 현재를 부단히 사랑하며 가꾸어 나가는 기다림이어야 함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현재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을 나누고 사랑하며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주어진 시간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일 년의 가치를 알고 싶다면, 학점을 받지 못한 학생에게 물어 보세요. 한 달의 가치를 알고 싶다면, 미숙아를 낳은 어머니를 찾아가세요. 하루의 가치는 신문 편집장들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한 시간의 가치가 궁금하면,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물어 보세요. 일 분의 가치는, 열차를 놓친 사람에게, 일 초의 가치는 아찔한 사고를 순간적으로 피할 수 있었던 사람에게, 천 분의 일 초의 소중함은, 아깝게 은메달에 머문 육상 선수에게 물어 보세요.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또한, 당신에게 너무나 특별한, 그래서 시간을 투자할 만큼 그렇게 소중한 사람과 시간을 공유했기에 그 순간은 더욱 소중합니다.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 어제는 이미 지나간 역사이며,

미래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이야말로 당신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Present)를 선물(Presant) 이라고 부릅니다.”

한 순간 순간을 진정 아끼고 사랑하며, 참된 진리의 생명을, 영원한 삶을 기다려야 합니다.


2.버림과 떠남의 기다림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마태 24, 38~39).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 우리는 버림과 떠남을 기억합니다. 버림은, 세속적인 가치와 물질적 욕심에 집착함을 버리는 것입니다.

끝내는 그것들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함이요, 결국 가져갈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떠남은, 우리가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무를 수 없기에, 결국 세상과 하직할 날이 오기 때문에 끊임없는 떠남의 연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거듭 우리 주변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가벼워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날의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것에 희망을 둡니다.

그 기쁨의 희망은 계속된 버림과 떠남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버림과 떠남에 우리 신앙인은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 27).

프랑스의 사상가 ‘파스칼(1623~ 1662)’은,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 가슴에 구멍 하나씩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빈 구멍을 세상 것으로 메워 보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지식, 권력, 부귀, 영화, 온갖 흥미로운 일들과 미신적인 행위들로 말입니다.

그러나 인생 종말엔 그 모두가 허망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운명처럼 만들어진 구멍은 하느님께서 당신으로 메우도록 만드셨기에, 하느님으로만 구멍을 메울 수 있다고 파스칼은 말합니다. 우리의 고독과 황량함을 채우러 오시는 주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는 참된 기다림의 대림이 돼야 합니다.

[말씀자료:-배광하 신부-편집:원 근식요아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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