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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으로 만나는 우리 교황님 66~70>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1-05 조회수 : 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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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으로 만나는 우리 교황님(66)>

(루카 2,19: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마리아의) 침묵은 우리의 마음 속에 (하느님 뜻을) 잘 간직하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침묵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구유를 바라보면서 침묵 중에 머무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구유 앞에서 우리는 (이미) 사랑 받은 존재임을 깨닫게 되고, (우리가 지닌) 생명의 참된 의미를 음미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침묵하는 가운데 (구유를) 바라보면서 (아기)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말씀하시도록 해봅시다. 그분의 조촐[미소]함이 우리의 교만을 꺾어버리도록, 그분의 가난이 우리의 호사스러움을 불편하게 만들도록, 그분의 사랑이 무감각한 우리 마음을 감동시키도록 해봅시다. 매일 하느님과 함께하는 침묵의 시간을 (잠시라도) 쪼개내는[마련하는] 것이 우리의 영혼을 돌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침묵의 시간이) 우리를 소비문화의 타락한 허상으로부터,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광고[홍보]로부터, 넘쳐나는 빈말들로부터, 엄청난 뒷담화와 비난의 풍파로부터 우리의 (진정한) 자유를 지켜줍니다.(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 미사 강론, 201811)

 

<카톡으로 만나는 우리 교황님(67)>

(요한복음 123: 요한이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광야에서 이 소리를 들을 사람이나 있습니까? (이처럼)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듯한 곳에서 외치는 소리지만, 신앙의 위기로부터 기인된 혼돈[상실] 속에서 (세상을 향하여) 외치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세상이 신앙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저는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그 종교를 믿습니다. []”라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삶은 그리스도인다움에서 많이 동떨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꽤나 동떨어져 있습니다. (이제) 종교와 신앙은 나는 믿는가?” “(나는) 믿는다!”라는 (말로써 하는) 표현으로만 치부돼 버립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는 것과 그분[하느님]을 찾기 위하여 이 (회개의) 길을 가는 것에 대하여 깨닫게 됩니다. 그분[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이 행한 준비하라는 설교[외침]입니다. 우리에게 웃음[기쁨, 희망]”을 다시 선사하실 이 아기 예수님과의 만남을 준비하십시오.(일반알현, 2016127)

 

<카톡으로 만나는 우리 교황님(68)>

어머니인 거룩한 교회(요한 복음 11-14절이 선포하는) ‘빛의 신비, 구원의 말씀(우리 존재 안에) 맞아들이도록 초대합니다. 만일 우리가 빛이고 구원이신 예수님을 맞아들인다면, (우리는) 주님의 지식[]과 사랑 안에서 성숙하게 되며 그분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삼종기도, 201613)

 

<카톡으로 만나는 우리 교황님(69)>

(마태오 복음 417: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늘 나라”(17)를 선포하시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메시지는 세례자 요한의 것과 동일합니다. (하늘 나라는) 새로운 정치권력이 집권하게 되는 왕국이 아니라, 하느님과 정의와 평화의 시절을 시작하게 될 그분의 백성들사이에 맺어진 계약의 완성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과의 계약을 (더욱) 공고히 맺기 위하여, (하느님 백성인) 우리 모두는 자신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바꾸라는 회개에 불렸습니다. (여기서) ‘회개한다는 것은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뿐만 아니라, 생각의 방식[가치]도 또한 바꾸라는 것이 요체입니다.(삼종기도, 2017122)

 

<카톡으로 만나는 우리 교황님(70)>

사람[군중]들은 (예수님의) 제자들한테는 마음이 끌리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사랑[좋아]하는 예수님께는 () 관심을 가졌습니다. (제자들은 결코) 나쁜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사람들에게) 무관심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또한) 연민[동정]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무관심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몰랐습니다. (그런 까닭에 제자들은) 죄를 지은 후에, 스승을 배반한 후에, 스승을 버린 후에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자비와 연민[동정]의 정수[핵심]’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단호]합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6,37) (너희가) 그들을 돌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연민[동정](인류) 역사 안에서 (아무 거리낌없이) 늘 반복됐던 무관심 사이에 빚어진 충돌[이견]입니다. (세상에는) 착한 사람들이 많다지만, (그들은) 다른 이들의 필요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동정심[연민의 감정]을 지닐 수 없습니다. (비록 그들이) 착한 사람들일지라도, 아마도 그들의 마음에 (아직도) 하느님의 사랑이 들어오지 않았거나, (하느님의) 그런 사랑이 들어오도록 (그들의 마음을)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산타 마르타의 집 평일미사, 20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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