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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으로 만나는 우리 교황님 46~50>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12-15 조회수 : 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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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으로 만나는 우리 교황님(46)>

춤추는 것, 우는 것, (자기 뜻에 맞지 않는) 모든 것들은 두려워하면서, (반면에 자기가 원하는 다른) 모든 것들은 전부 아무 문제없어야 한다고 닦달하고 있는 이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저는 성령께 (자기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것을 두려워해서[주저해서] (주님의) 진리를 설파하는[가르치는] 이들을 늘 비판하는 슬픈[안타까운] 그리스도인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슬픈, 안타까운 모습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또한 (어느 순간에) 그런 모습이 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합시다. (마태복음 1116절에 나오는 장터의 아이들처럼 자기들 입맛에 따라 행했던 하느님 말씀에 대한) 잘못된[죽은 문자와도 같은] 설교[가르침] 때문에 (역동적으로 역사하시며)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의 (충만한) 자유로운 활동을 도외시하는 슬픈[가련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도록 기도합시다.(산타 마르타의 집 평일미사, 20131213)

 

<카톡으로 만나는 우리 교황님(47)>

성경에 따르면 (예언자) 엘리야는 아주 가난한 이들이 사는 작은 촌락에 신비로운 방식으로 갑자기 나타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명을 마친 후에는) 제자 엘리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승천하는 마지막 모습을 남깁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정확한 시작[출생, 신상정보]도 없고, 게다가 마침[죽음]도 없이 승천한[하늘로 납치된] 사람으로 인식됩니다. 이런 까닭에 메시아의 도래[오심]를 미리 알려주는 선구자로서 그[엘리야](다시 하늘에서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사람들은)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런 엘리야 예언자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들이 (자신들에게 닥치는) 유혹과 고통에 대해서는 () 이해하고 있지만, (자신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뤄야 할 이상[소명]에는 제대로 도달하지 못하는 처지에서 엘리야 예언자는 (믿는 이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모범이 됩니다.(일반 알현, 2020107)

 

<카톡으로 만나는 우리 교황님(48)>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세례자 요한이 (우리에게) 촉구한 시급한 회개에 대하여 (마음을 열어) 숙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의 공동체 안에) ‘구멍들[소외되고 버림받은 존재들]’이 존재한다면, (우리들이 원하는) ‘사랑과 애덕과 형제애의 관계를 맺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수많은 구멍들로 패인 도로를 지나갈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봉쇄와 배척이라는 (세상의) 부정적인[반인륜적인] 상황 앞에서도 (절대로)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속성[세상을 지배하는 정신]에 굴복 당하지 않도록 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의 중심은 예수님이시며, 그분의 말씀이 우리 삶의 빛이며 사랑이며 위로이기 때문입니다.(삼종기도, 2018129)

 

<카톡으로 만나는 우리 교황님(49)>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봉사하셨고,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사람들이 잘 깨달을 수 있도록 설명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람들을) 섬기는 것[봉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종의 모습을 취하셨는데, (역설적으로) 이것[종의 모습](사람들이 기꺼이 받아들인) 권한[권위]을 갖게 한 것입니다.(마태 21,23-27 참조) 반면에 사람들은 율법학자들의 말을 경청하고 그들을 존경했지만, 그들[율법학자들]의 권한[권위]에 대해서는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율법학자들]왕족의 심리[초엘리트의식, 선민의식]’를 지녔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교사이며, (하느님 나라에서는) 왕자들이기에 너희들을 가르치는 것이다.’(라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명령할 테니 너희는 따라라는 것은 (결코) 섬김[봉사]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어떤) 왕자처럼 행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항상 모든 이들의 종[봉사자]이셨는데, 이것이 그분께 권한[권위]를 드린 것입니다.(산타 마르타의 집 평일미사, 2017110)

 

<카톡으로 만나는 우리 교황님(50)>

(나의 마음은) 어디에 의지[의탁]하고 있습니까? 권세입니까, (이해관계에서 유용한) 친구입니까, 돈입니까?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그 대답이) 주님 안에! (의지, 의탁한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유산입니다.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스바 3,12) (스바니야 예언자가 말하는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의 뜻을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영적으로, 존재적으로) 가난한[겸허한] 백성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하느님의 풍요로움에 의탁하기 때문에 가련한[미천한, 불쌍한]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지녔기에) 만일 자신이 부유하다고 할 지라도 (그의 재물을) 잘 운영[하느님의 뜻에 맡게]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오직 주님만이 자신에게 (구원에 도움이 되는) 좋은 삶을 살도록 확실하게 이끌어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주님께 의탁합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두 아들의 비유, 마태복음 2128-32) 말씀을 들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이러한 것들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듣기에는 몹시 불편했겠지만) (세리와) 창녀가 하느님의 나라에 (그들보다) 먼저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산타 마르타의 집 평일미사, 201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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