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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으로 만나는 우리 교황님 31~35>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12-01 조회수 : 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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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으로 만나는 우리 교황님(31)>

루카복음은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라며 경고합니다. (복음은) 우리의 (마음과 머리 속에 있는 현재의) 생각들과 (우리에게) 오고 계시는 예수님과 연관 지으면서, (참으로 무엇이) ‘머리를 드는 것, 기도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혹은 어떤 사람을 기다릴 때는 머리를 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그분을 깨어있음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 기도를 바치며 기다리고자 합니다. , ‘기도하는 것,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 다른 이들에게 (내 자신을) 여는 것, 깨어있는 것, 우리 자신 안에 갇혀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이 (다시금) 필요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에게 한 약속을 이루어 주겠다. 그날과 그때에 내가 다윗을 위하여 정의의 싹을 돋아나게 하리니, 그가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룰 것이다.”(예레 33,14-15) (예레미야 예언자가 예언한) 그 정의의 싹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기다리는 것이고, 오시는 분이 (정의의 싹으로서 세상에 참된 공정과 정의를 이루시는) 예수님이십니다.(삼종기도, 2018122)

 

<카톡으로 만나는 우리 교황님(32)>

(어떤 때는 그다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없는) 우리 각자의 개인적인 인생사를 대하듯이, (이른바) ‘인류의 역사‘(별다른) 의미도 지니지 않는 말들과 사실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단순하게 연속된 것정도라고 이해돼서는 안되겠습니다. 또한 (인류의 역사는) 운명론적[예정론적]인 시각으로 해석돼서도 안됩니다. (고작 그렇게 우리 인류의 역사를 바라본다면) 마치 모든 것들이 (그 상황에서) ‘개별적 자유를 행사할 여지를 빼앗긴 채 미리 정해진 운명에 따랐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런 해석 안에는) 우리가 (선한 지향으로 행한) 진지한 결정의 열매라고 할 수 있는 선택은 할 수 없고 필요도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알게 된) 결국은 마주할 수 밖에 없는 (우주와 세상의) 근본적인 원리를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루카 21,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 중에 진리입니다. 그 날이 오면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아드님의 말씀이 자신의 존재와 인생을 비추었는지’, 아니면 (자기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자신이 주장하던 말에 더 의지하고 따르며 살아왔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이 우리 각자 모두에게는, 자신의 인생사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완전히 버리고, 그분의 자비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삼종기도, 20181118)

 

<카톡으로 만나는 우리 교황님(33)>

()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내적으로[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상태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주변만을 맴도는 것으로부터 생겨납니다. , (오로지) 자기의 주변만을 살피면서 자신의 문제, 기쁨과 고통 속에다만 자신의 인생을 가둬놓은 채 (다른 이들을 향해서는) 담을 친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에서 생겨납니다. 이렇듯 (영적으로 내적으로) 지쳐있고 (살맛을 잃은 것처럼) 싫증난 마음을 지닌 사람은 희망에 대해서도 자신을 닫아버립니다. (바로) 여기에서 복음이 언급하는 (영적으로 내적으로) 무감각함과 나태함의 뿌리를 찾게 됩니다. 대림시기는 우리가 (더 이상) 자기 안에만 머물지 말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으로 (눈을 들어) 바깥세상을 바라보면서, 사람들과 형제들의 필요에 우리의 마음을 열도록 생각[정신]을 펼치라는 (영적) 소명에 () 깨어있으라는 초대입니다.(삼종기도, 2018122)

 

<카톡으로 만나는 우리 교황님(34)>

오늘 (우리는) 주님 성탄 대축일을 () 준비하기 위한 전례시기인 대림절을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대림절은)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을 열고 시선을 (예수님께) 들어올리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시기입니다. 대림절 기간 동안 우리는 성탄절에 대한 기다림으로만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 기다림은) 종말 때에 (다시) 돌아오시는 그분을 (우리가) 용기 있게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님으로 선택한 삶을 살면서 그분과의 결정적인 만남을 준비하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대한 기다림에도 깨어있으라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성탄절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재림을 기다리는 것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인격적인[개별적인] 만남의 날도 기다리는 것임을 기억합시다. 앞으로 우리는 4주간의 대림절 기간 동안 (지난날) 의례적으로 지내오던 (몸에 배어든)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위한 희망과 꿈을 키워갈 수 있도록 자기 밖으로 향해야 합니다. 이 시기야말로 어떻게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하고, 누구를 위한 삶을 (우리가)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스스로에게 자문해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기 위한 기회입니다.(삼종기도, 2018122)

 

<카톡으로 만나는 우리 교황님(35)>

부르심[소명]은 매일 그들이 행하는 활동의 충만함 안에서 (실제적으로) 완성[성취]됩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일반적이지 않거나 경탄할 방식으로써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성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바로 그 일상성 안에서 우리는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그분께서는 우리 마음에 당신의 사랑을 느끼도록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그분과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게 되고, (결국에는) 우리의 마음이 바뀌게 됩니다. (어느 날) 네 명의 어부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즉각적으로 기꺼이 행한 응답이 그와 같은 예입니다. “그들은 곧바로 배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마태 4,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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