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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6주일/고통에 대한 의미 부여&무관심의 죄/양승국 조명연 신부
작성자 : 원요아킴   작성일 : 2016-09-24 조회수 : 2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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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루가 16,19-31)


고통에 대한 의미 부여 


주변을 살펴보면 라자로 못지않게 참혹한 고통을 하루하루 견뎌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찢어질 듯 극심한 가난으로 인한 고통, 선천적 장애로 인한 고통,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로 인한 고통, 심각한 정신적 육체적 질병으로 인한 고통, 한번 나름대로 인간답게 살아보려고 아등바등 노력해보지만 꼬이기만 하는 인생으로 인한 고통...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고통, 좀 잔잔해졌나 싶으면 또 다시 엄습해오는 고통, 도대체 고통은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왜 고통은 끊이지 않을까요?  

그래서 인류 역사상 고통은 우리 인간 모두의 ‘화두’였고, 대화의 단골주제였고,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였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고통의 역사였습니다. 고통은 인간의 삶과 분리시키려고 그렇게 애를 써도 절대로 분리시킬 수 없었던 삶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습니다. 삶 자체가 고통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었던 바오로 사도는 이런 표현까지 썼습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로마 8장 22절) 오늘도 고통은 우리에게 한 가지 과제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통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탐구’입니다. ‘고통의 구원 적 의미의 이해’입니다.  다행히 고통이란 풀리지 않는 인생의 문제에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신 분이 계십니다. 고통의 인간 예수님이십니다. 스스로 고통의 가장 극점인 십자가 위로 걸어 올라가신 예수님이십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오늘 겪고 있는 이 극심한 고통, 조금이나마 완화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위로의 말도 아닙니다. 달콤한 격려의 말도 아닙니다. 누군가가 나와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보는 순간입니다. 더 나아가 나보다 더 큰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입니다. 신기하게도 그 순간, ‘그래. 나만 고통 겪고 있는 것이 아니었구나. 저기 봐. 저 사람은 나보다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잖아?’ 하면서 내 고통의 정도가 순식간에 완화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오늘도 고통의 인간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고통을 모두 거두어 당신 고통에 합하십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이미 거의 거두어 가셔서 별로 무게도 나가지 않는 너무나 가벼운 십자가입니다. 우리 모두의 고통과 십자가를 당신 한 몸에 지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홀로 골고타 언덕을 오르고 계십니다. 고통의 전문가였던 바오로 사도는 오랜 세월 고통에 대해 연구하고 또 연구한 끝에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통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새 1장 24절) 우리는 고통을 겪을 때 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내게 다가온 이 고통, 기꺼이 견뎌낼 때 마다 예수님께서 느끼고 계신 고통의 강도가 조금이나마 완화된다는 것, 내가 직면하고 있는 이 고통, 기쁘게 이겨낼 때 그리스도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을...

[말씀자료:양승국 신부]


무관심의 죄 


어느 추운 겨울 날, 아주 어린 소녀가 하나가 얇은 옷만 입고서 추위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앞으로는 예쁘고 화사한 옷을 입은 또 다른 소녀가 아빠의 손을 잡고 행복한 표정을 지으면서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조적인 모습이 한 장면으로 펼쳐지는 것을 본 어떤 사람이 화가 치밀어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주님께 따집니다.  

“주님, 당신은 왜 이렇게도 불공평하십니까? 한 소녀는 저렇게 행복을 느끼며 살도록 하면서, 왜 저 불쌍한 소녀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주시지 않습니까? 저 소녀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왜 아무런 대책을 세우시지 않습니까?”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나는 분명히 대책을 세웠다. 그래서 너를 그 시간에 보내어 네 눈에 소녀를 보게끔 한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너는 과연 무엇을 했느냐?” 

주님께서는 결코 불공평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안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우리 인간들이 불공평한 주님으로 만들고 있을 뿐이었지요.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렇게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우리들이 어떻게 될 지를 오늘 복음을 통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보고서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의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고, 반대로 이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복락을 얻는다.” 

하지만 단순히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저승에서 뜨거운 불길 속에서 고초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자리에서 실천하지 않는, 즉 내 이웃에 대한 무관심 한 사람은 구원될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나름대로 선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라자로를 자기 친척들에게 보내어서 자신이 있는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달라는 말까지도 하지요. 그렇다면 그가 저승의 고통을 당해야 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무관심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병중에 있었던 라자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라도 배를 채우길 간절히 바랬지요. 당시의 풍습에 따르면 식탁에 앉은 사람들이 식사가 끝나면 손을 씻는데 빵으로 손을 문질러 씻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빵 부스러기를 식탁 밑으로 던졌지요. 바로 라자로는 그 빵 부스러기를 얻어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개들이 와서 종기를 핥을 뿐이었습니다. 그만큼 부자는 라자로에 대해서 무관심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무관심에 대해서 꾸짖습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성경에 나오는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니 그러한 고통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제비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어미로부터 먹이를 받아먹는 제비새끼들을 볼 수가 있었지요. 그런데 이렇게 언제 날 지 모를 제비새끼들이 어느 한 순간에 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제비새끼들이 비행학교를 다닌 것도 아닐 테고 또 어미에게 특별 강의를 받은 것도 아닐 텐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아주 멋지게 납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타고난 본능이 있기 때문이지요. 제비만의 그 타고난 본능으로 나는 것을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만의 타고난 본능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면 행복하고, 반대로 사랑하지 않으면 마음이 그렇게 편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들은 내 안에 있는 이 본능에 얼마나 충실했을까요?  

무관심으로 일관하면서 자신의 본능에 역행하는 부자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하지 맙시다. 

[말씀자료:조명연 마태오 신부] [편 집:원근식요아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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