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곡본동성당:::
  • 
  • 

홈 > 성당소식 >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연중 제28주일/와서 나를 따르라/구 요비 신부
작성자 : 원요아킴   작성일 : 2015-10-10 조회수 : 2382
파일첨부 :

590.jpg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


(마르코 10,17-30) 


오늘의 묵상 


와서 나를 따라라 

                                                                          -구 요비 신부-

한 국인은인생에서무엇을가장중요하게여기는가?’ 매년 실시하는 한국종합사회조사(KGSS)의 자료는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은 건강(39.2%), 가족 (28.9%), 돈(16.2%), 친구(4.8%) 순으로 비중이 크며 종교는 2.8%라고 합니다.‘ 돈’의비중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으며 다른 연구조사에서‘나는 물질주의자이다’라는 비율이 50.4%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사실 제가 잘 아는 청년신자 들에게 이와 비슷한 질문을 했을 때도 스스럼없이‘그야 물론 돈이지요!’하고 대답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어떤 부자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우선, 이 사람은 높은 정신적? 도덕적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온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이 선(善)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17절) ‘선은 모든 것이 욕구하는 것’(아리스토텔레스)이라면, 인간의 모든 욕망의 종점은 선이라 하겠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볼 때 만물이 갈망하는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분은 선(善)자체이신 하느님 한 분 뿐이십니다(18절).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 부자에게“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21절)”하고 요청하시는 걸까요? 그리고 왜 이 부자는 주님의 이 고귀한 초대를 거부까지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 인간성 안에는 근원적으로 선을 지향하고 갈망함과 더불어 이에 저항하는 뿌리인 물질적인 소유욕이 깊게 도사리고 있음을 밝혀줍니다. 

교회는‘인간은 무엇을 소유(所有)하느냐 보다 오히려 어떠한 존재(存在)이냐에 따라 가치를 지닌다.(사목헌장 35항)’고 가르치는데 인간이‘존재’로는 선(善)을 갈망하지만 실제로는 소유욕에 사로잡혀 주저앉고 마는 현실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이 이율배반과 모순을 극복하는 길을 오늘 예수님은 십계명을 통하여 제시하십니다. 사실, 이 계명들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계명은 우리를 구속하고 억압하고 부자유스럽게 하는 금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 험악한 세상 안에서 무 방비 상태로 던져진 나약한 우리들을 보호해 주시려는 하느님의 따스한 배려인 것입니다. 

이 계명의 근본 의미는‘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외적인 삶을 규정하고 거기에만 머무르는 율법이 아니라 선(善) 자체 이신 하느님 앞에 우리가 서도록(18절), 또 율법의 완성이시며 그 자체이신 당신을 만나고 함께 살기 위하여 따라 나서도록(21절) 우리를 초대 하십니다“. 

와서 나를 따라라.”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의 모습에서 우리 신앙인들이 자 주 직면하는 외적 생활과 내면생활의 분리, 신앙과 행동의 분열을 보게 됩니다. 

이 이면에는 우리 인간이 근본적으로 주님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불신과 불순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을 받아 누리기는 원하면 서 이 하느님의 사랑에 인격적으로 응답하지 못하는 비신앙의 풍토 속에서 신학자 본회퍼는‘믿는 자는 순종하고 순종하는 자는 믿는다.’를 강조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응답이 바로 이를 말해줍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28절) 



☆  ☆  ☆  ☆  ☆  ☆  ☆  ☆  ☆  ☆  ☆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이 기양  신부- 



요즘 우리들의 생명을 제일 많이 위협하는 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현대인의 불치병인 암, 에이즈보다도 더 무서운 병이 있습니다. 암이나 에이즈는 사람의 육체만을 공격하고 죽이지만 이 병은 인간의 영혼까지도 죽이고 부모 자식간의 관계도 끊게 만들뿐만 아니라 형제지간의 왕래까지도 단절시키는 위력이 있습니다. 바로 돈의 유혹이라는 병입니다. 황금만능주의라는 병입니다. 이 재물의 욕심에 빠지면 인간은 완전히 초토화되고 맙니다. 그런데 이러한 엄청난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도대체 그 병에 걸렸는지 안 걸렸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지금 우리 현실의 모습니다. 오늘은 재물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되는지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옛날에 어느 의좋은 형제가 함께 산길을 가다가 우연히 금 덩어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형제는 뛸 듯이 기뻐하며 금 덩어리를 똑같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꿈에 부풀어 기분 좋게 길을 가던 형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말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다가 형제는 어느 큰 연못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걸음을 멈춘 동생이 금 덩어리를 꺼내 연못 속으로 멀리 집어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형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니 얘야, 너 무슨 짓이냐?

 저 금 덩어리가 생긴 순간부터 형이 없어졌으면 하는 못된 생각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어요, 형님. 그래서 금 덩어리를 버렸습니다.

그러자 형이 동생의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잘했구나. 나도 그랬단다.

그리고는 자기 몫의 금 덩어리를 꺼내 연못 속으로 힘껏 던져버렸습니다. 

우리는 돈보다 형제애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 앞의 이야기에서 두 형제가 형제애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면 둘이 함께 가는 길에 아마 비극이 벌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비극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무엇이나 돈이면 다 된다는 천박한 자본주의 사상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온 사회의 각계각층을 휩쓸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가장 친밀한 관계인 부부간이나 부모자식 간에도 돈으로 인한 갈등이 점점 심화되어 가고만 있는 실정이지요. 돈 때문에 혈연사이에 의절하는 경우, 사람을 해치게 되는 경우들이 생기고 하루아침에 돈으로 인해 패가망신하는 정치인, 경제인들이 수두룩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누구도 이 돈이라는 것에 자유롭지 못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찾아와 무릎을 꿇고 절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으니 하느님을 따를 수 있지 않느냐고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대견해하시며 마지막으로 이런 요구를 하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10,21) 

그러나 부자 청년은 재산만은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포기한 것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 신자들 중에도 부자 청년과 같은 결단을 하고 당연히 예수님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우리 현실이 아니냐고 이야기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내 재산을 포기해야 하고 또 가난한 사람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어야 한다면 그럴 사람이 있겠는가? 회의하며 부자 청년의 입장에 설 사람들이 굉장히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부자 청년의 결정에 동조하는 사람이라면 재산 문제가 생길 때 부모와 형제보다는 재산을 택할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입니다. 너무나도 깊숙이, 지켜져야 할 마지막 보루까지에도 속속히 침투된 황금만능사상이 우리들의 삶을 참으로 힘겹게 만들고 있습니다. 돈이 하느님과 사람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상을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 시대의 비극은 계속될 수밖에 없고 인간의 가치는 거듭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 어떤 것보다도 하느님과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사람이 돈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명확히 깨닫고 그것을 우리 자녀들에게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가르쳐 주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어둡습니다. 요즈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녀들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고 마지막 노후를 길거리에서 보내고 있습니까? 그 근간에는 부모보다도 자녀보다도 형제보다도 재물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황금만능사상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지요. 재물에 대한 유혹이 우리 시대를 비인간적인 사회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흐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직접 부모가 가르치고 보여줘야 합니다. 그럴 때 살아있는 교육이 됩니다. 아무리 입으로 말해도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사회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이렇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매일 싸움을 많이 하여 마침내 파경을 맞게 된 부부가 있다고 합시다.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돈이 부부애보다 우선한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돈만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반대로 그렇게 어려울 때일수록 부부가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자녀를 위하며 산다면 그 자녀들은 온몸으로 가족애를 배우게 됩니다. 돈보다는 가정이 중요하며 부부간의 사랑이 큰 재산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지요. 말은 소용없습니다.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효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집은 형제가 많은데도 부모를 모실 사람이 없어서 부모가 이리저리 짐짝처럼 떠밀려 다니는 경우가 있습니다. 집이 좁다는, 또 아이가 대학 입학시험 공부 중이라는 이유들이 다 있지요.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가 나중에 그 부모를 모시게 되겠습니까? 더하면 더했지 절대 부모가 바라는 효도는 하지 못할 것입니다. 배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렵고 힘들어도 나를 키워주시고 나를 위해 헌신하신 부모에게 최대한 정성과 공경을 드리는 그런 부모를 보고 자란 자녀는 또 그래도 따라하게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과 제자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사는 아이들, 또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만 챙기고 편애하는 교사가 아니라 모든 학생을 사랑하고 아끼려고 노력하는 교사의 모습을 보인다면 제자들은 그런 스승을 존경하며 닮게 될 것입니다. 촌지라는 불순물이 끼어들어도 끄떡 안하는 스승을 존경하며 닮게 될 것입니다. 

또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에게 아무리 신심을 강요하고 잔소리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부모가 삶에서 실천함으로써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첫째로 모시고 주일이면 만사 제치고 미사에 가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며, 또 정성을 다해서 교무금과 헌금을 준비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그 부모를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일생의 중요한 시기때 마다 하느님께 의지하고 기도하며 성사로써 삶을 꾸려 가는 그런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들이 당연히 부모의 신앙을 이어가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각계각층에서 돈보다도 더 중요한 가치와 사랑과 정신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 우리 자녀들은 하느님과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 현실에 만연한 비극이 극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부자라면 부모도 잘 모시고 형제간에 우애도 더 챙기며, 하느님께도 잘 봉헌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핑계를 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실천의 잣대는 재물의 유무가 절대 아닙니다. 

가난해서 부모나 형제, 또 이웃을 돌볼 여유가 없다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재물을 중시하기 때문에 나눌 수가 없을 뿐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사람이 재물보다 중요하다는 기본 정서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인간답게 사는 길은 돈보다도 하느님과 사람이 먼저라는 것을 기억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사람과 하느님이 우선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재물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리면 모든 것이 파괴되고 마는 비극의 사회가 온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인간이 모든 것에 우선되어야 함을 부자 청년의 어리석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부자 청년의 어리석음을 답습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느님과 사람이 우선인 삶을 살 때 나도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전글 전신자 야외행사 노인대학(2번)
다음글 2015년 성모시니어아카데미 노인의 날 (1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