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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4주일/사랑 나눔은 하늘을 감동시킨다./배광하 신부
작성자 : 원요아킴   작성일 : 2015-09-12 조회수 :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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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마르코 8,27-35)


사랑 나눔은 하늘을 감동시킨다.                                     -배광하신부-

주님을 따르리 

행동하는 신앙 

예전 어느 마을에 오랜 가뭄으로 비가 오지 않자, 주임 신부가 주일에 교우들에게 비오기를 진심으로 기도하자고 권고 한 뒤 다음 주에는 꼭 비가 올 것이라고 확신에 차서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주일이 되자 해가 떴고 비는 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교우들은 모두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임 신부는 비가 올 것이라는 확신에 찬 믿음이 없으니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고, 그러기에 비가 오지 않는 것이라며 교우들을 나무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 또한 시골 본당에서 사목할 때 비가 오지 않아 죄스러움에 몇 주 샤워를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교우들과 반성을 해 보자며 다음 열 가지를 이야기 하였습니다. “정말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았는가?”, “우리의 삶이 이기적이지는 않았는가?”, “굶어 죽어가는 아프리카, 인도, 북녘 동포들을 생각해 보았는가?”, “우리가 훼손하였던 자연에 대한 뼈아픈 반성은 있었는가?”, “우리나라는 물 부족 국가가 아니라, 물 낭비 국가라고 하는데 진정 물을 소중히 썼는가?”, “희생으로 온 정성을 다하여 기도해 보았는가?”, “이같은 가뭄이 하느님의 가르침이요, 나아가 경고라는 인식을 해 보았는가?”, “가뭄에 대한 사전의 준비뿐 아니라, 이제는 천국에 가기 위한 영혼의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하지 않은가?”, “서로 물을 더 가지려고 아귀다툼을 벌이지는 않았는지, 나누어야 하늘도 감동하여 비를 뿌려 주신다는 생각을 가져 보았는지?”, “주님께서 모든 것을 채워 주시고 뿌려 주신다는 희망을 살았는지?”등이었습니다. 

이야기 하다 보니 가장 중요한 요점은 ‘믿음’과 ‘나눔’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핵심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 것입니다. 이 같은 사랑의 나눔이 세상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하늘을 감동시키며 인간을 딱한 처지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우리는 매 미사 때마다 듣고 또 들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는 온전히 내어 주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본받아, 우리 또한 행동하는 나눔의 삶을 살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야고 2,14) 


부끄러움이 없으리,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제껏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기만 하였습니다. 나아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던 사랑은 끝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교리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육화의 교리입니다. 부활은 가장 위대한 신앙고백이며, 육화는 보아야 하는 약하고 부족한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끝없는 표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위대함을 다 감추시고 스스로 낮은 자가 되셨습니다. 실로 위대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사 당신 자신을 십자가의 고통에 다 내어주신 크신 사랑을 몸소 보여 주신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성 바오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필리2,6-9) 

자신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이고, 자신이 가장 비참하다고 느낄 때 그때 바로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낮아질 때가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길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 인간을 영원히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내버려 두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르 8,34)이 복음 말씀을 통해 분명 당신께서는 가장 낮은 자리에 임하셨던 분이셨고, 가장 고통받는 분이셨음을 오늘 우리에게 알리고 계신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 또한 세상의 그 어떤 판단과 편견에도 결코 부끄러울 수 없습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길이며, 그분을 따르는 길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자료 : -배광하 신부- / 편집 : 원 근식 요아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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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스승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그리스도’라고 답변합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구원할 주인이란 뜻입니다. 어떤 세상을 구원할 주인이신지요? 무엇보다 먼저, 나에게 ‘맡겨진 세상’입니다. 책임져야 할 사람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는 나의 미래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달리 말하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며 믿고’ 있느냐? ‘무엇을 원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느냐?’ 이 말씀입니다. 고통과 재앙이 피해 가기를 원하고 있다면 곤란합니다. 사고나 위험이 전혀 없기를 바라고 있다면 이것 역시 곤란합니다. 신앙생활은 ‘불행을 피해 가는’ 수단이 아닌 까닭입니다. 오히려 역경 속에서도 버틸 수 있는 ‘힘을 청하는 것’이 믿음의 기본자세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내게 맡겨진 세상’을 구원해 주실 주님이십니다. 인생의 주인이시고, 운명의 주인이시며, ‘모든 소유’의 주인이시란 말씀입니다. 그분이 주셨기에 내 몸이 있고, 건강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니, 삶이 어렵고 관계가 힘들더라도, 십자가로 여기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고백 안에는 엄청난 가르침이 숨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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