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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1주일/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의 나무/서광석 신부
작성자 : 원요아킴   작성일 : 2015-06-13 조회수 : 2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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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11주일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마르코. 4,26-34) 

오늘의 묵상 


나무는 저절로 자라는 듯이 보인다. 때가 되면 잎이 나고, 시간이 흐르면 큰 나무가 되는 듯이 느껴진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저절로 자라는 듯이 보일 뿐이다. 보이는 나무 뒤에는 ‘보이지 않는’ 뿌리가 있다. 나무의 성장은 뿌리가 좌우한다.

뿌리는 땅속에 있다. 지하에 흐르는 물과 영양을 빨아들여 줄기로 보낸다. 그러니 뿌리의 활동이 멈추면 나무는 절대로 자랄 수 없다. 하지만 뿌리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면 이미 뿌리가 아니다. 

신앙생활이란 나무에도 뿌리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부분입니다. 사람들이 모르는 ‘자신만의 시간’입니다. 그 부분이 튼튼하면 줄기는 자동적으로 건강해지고 꽃은 당당하게 피어납니다. 보이지 않는 기도 생활입니다. 드러나지 않게 성사 생활에 힘쓰는 것입니다. 남모르게 베푸는 선행이 ‘신앙이란 나무’의 살아 있는 뿌리입니다.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된다고 했습니다. 작은 믿음도 정성으로 다가가면 큰 믿음이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정성 역시 보이지 않는 부분을 잘할 때 빛을 발합니다. 강한 겨자 나무도 뿌리가 시원찮으면 자라날 수 없습니다. 언제라도 ‘보이지 않는 부분’이 ‘보이는 부분’을 좌우합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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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나무 



-서광석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 28)하고 말씀하시고, 그 하느님 나라를 '작은 겨자씨'에 비유하신다. 씨앗에 싹이 터서 순간순간의 세월과 함께 큰 나무로 자라듯, 하느님 나라 또한 이와 같다고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비유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그와 비슷한 다른 사물이나 현상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므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징적으로는 맞고 문헌적으로는 틀리다. 듣는 이에게 알아들으려는 마음이 없으면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 

   작은 겨자씨 비유의 본질은 우리 마음에 뿌려진 사랑의 씨앗이다. 그러나 인간 지성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씨앗의 생물학적 변화 정도일 뿐이다. 피조물 하나하나의 속성과 그 개개에 관한 창조주의 사랑과 목적은 파악할 수 없다. 

 이러한 비유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행한 작은 사랑의 행위로 공동체가 변화되는 모습을 보며 하느님 나라를 유추해 낼 수 있다. 

 하느님 나라를 나타내는 그리스도인은 사회의 거울이자 시대의 표징이다. 인간 안에 내재하는 하늘의 씨앗은 하느님 은총과 더불어 그 사람 일생이라는 나무를 통해 드러난다. 그러므로 생활 전체에 걸친 행복한 삶의 지수는 인간 속성에 대한 고찰에서 출발해야 한다.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가에 대한 성찰 없이 제도나 윤리로 속박하는 것은 이론의 교의로 빠져들 위험이 크다.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편협함은 경계해야 한다. 개개 나무의 특성을 유념하는 '구체적 사랑'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하느님 사랑은 천재의 영역이 아니라 성숙한 사람의 영역이다. 천재는 기발한 발상을 통해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경험으로 사랑의 지혜를 넓혀나가는 법이다. 

 하느님 사랑 안에 성숙한 자는 동물 중에 최상의 동물이다. 그러나 이 사랑을 벗어나면 동물 가운데 가장 저급한 동물로 전락한다. 위선과 불의로 무장된 인간은 자신과 타인에게 가장 해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어떻게 완전히 불행해질 수 있는가?'하는 제목의 글을 찾았다.  "자기만 생각하십시오. 자기에 관한 말만 하십시오. 할 수 있는 한 '나'라는 말을 많이 쓰십시오. 감사하다는 말을 들으려고 하십시오. 사람들이 자신에 대하여 하는 말에 신경을 쓰십시오. 질투하고 욕심을 부리십시오. 사소한 것도 지나치지 마십시오. 비판을 절대로 용서하지 마십시오. 자신 외에는 누구도 믿지 마십시오. 자기에게 좋은 시간만 고집하십시오. 할 수 있는 한 다른 사람에게는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자기를 최고로 사랑하십시오. 이기적으로 사십시오.(…) 이렇게만 하면 당신은 확실히 완전하게 불행해질 것입니다. 자기, 자기, 자기 그리고 나, 나, 나. 당신이 자기만을 위하여 살면, 자기 생각과 자기 관심만 반복하다가 지겨워서 죽을 것입니다." 

 사회는 점점 타락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느님께서 역사하심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사랑과 정의가 실현돼야 함이 마땅한 것으로 점점 더 인식돼 가고, 인간과 더 나아가 창조된 자연까지도 존중돼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작은 겨자씨가 싹이 터서 자라 큰 나무가 되고, 숲을 이뤄 다른 피조물의 쉼터가 되듯, 신앙인 각자는 우리 안에 뿌려진 사랑의 씨앗을 키워서 다른 이에게 안식처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 뜻에 맞는 한 그루의 성숙한 사랑의 나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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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이 크다” 

-고찬근신부- 

‘세쿼이아(Sequoia)’라는 나무가 있는데 그 중 어떤 것은 이천 년을 넘게 살며, 높이는 80미터, 둘레는 30미터, 무게는 1,300톤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씨앗은 무척 작아 잘 보이지도 않는다지요. 매년 봄이 되면 거무튀튀한 나무에서 형형색색의 꽃과 어린 연두색의 새순이 터져 나오고 가을이 되면 달콤한 열매가 맺힙니다. 자연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힘이 느껴집니다. 오늘 복음에는 겨자씨의 비유가 나오는데 이 비유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 작지만 큰 생명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삶 속에서 미소, 작은 선행, 작은 관심, 작은 용서 같은 것들은 점점 자라나 하느님 나라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작은 겨자씨같이 시작되는 것처럼, 작은 무관심, 작은 거짓말, 미움, 시기, 질투 같은 것들도 점점 자라나 지옥 같은 세상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수천억 개 은하의 엄청난 우주가 존재하고, 작은 씨앗이 거대한 나무로 변하고, 봄이면 팝콘처럼 벚꽃이 터져 나 오고, 옹알이를 하던 아기가 건장한 청년이 되고,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회색빛 노인의 뺨에 눈물이 흐르는 것은 모두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세상만사가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겨자씨 하나 보고 갑자기 큰 나무가 되라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한 사람의 슈퍼맨이 갑자기 세우는 것도, 제도와 법으로 인간을 통제함으로써 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꽃이 피는 과정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결국은 활짝 피듯이 하느님 나라도 천천히 자연스럽게 변화되어 이룩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여러 사람들의 작은 마음, 작은 선행, 고운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모여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를 세워야 하는 우리는, 조급증을 버리고, 어떤 경우라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며, 작은 것, 작은일, 작은 마음들도 소중히 여기는 삶의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사랑이란 것은 전염성이 있어서 누군가 사랑을 시작하면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있습니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듯이, 우리들의 작은 사랑들도 모이고 모이면 세상을 바꾸는 큰 사랑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돈이나 재물의 힘은 철석같이 믿으면서 하느님이 뒤에 계신 사랑의 힘은 별로 믿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는 진정한 힘은 그 사랑의 힘인데 말입니다. 돈오점수(頓悟點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점진적 수행단계가 따른다는 뜻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욕심마저 버리고 성실히 수행할 때 문득 깨달음이 오듯이, 우리 안에 하느님이 심어주신 작은 겨자씨에 대한 희망을 품고 하루하루 사랑한다면, 우리는 어느 날 하느님 나라를 받치는 커다란 사랑나무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말씀자료 : -배광하신부- I 편집 : 원 근식 요아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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