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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주일/회개를 선포한 예언자/장재봉 신부
작성자 : 원요아킴   작성일 : 2015-01-24 조회수 : 2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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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갈릴레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어부 시몬과 안드레아를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마르코 1,14-20)

회개를 선포한 예언자                             -장재봉 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인공 요나와 세례자 요한의 상황이 뚜렷이 비교됩니다. 따져보면 잘한 일이라고는 제대로 한 것이 없는 듯한 요나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의 상징으로 빗대어 이르실 정도로 특별한 대우를 받습니다. 반면, 평생 그분의 길을 닦기 위해 온 삶을 헌신한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에는 일언반구도 없으십니다. 적어도 한마디쯤,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실 법한데 마치 그가 감옥에 갇히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하느님의 명령을 묵살하고 도망치던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서 꺼내주신 하느님 아니던가요? 사흘이나 걸리는 큰 성읍을 고작 하룻길만 걸어가 그분의 명령을 마지못해 수행했던 요나의 꼼수를 눈감아 주신 분 아니신가요? 주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신 일마저 심통을 부릴 적에도 “아주까리 잎으로 그늘을 드리워” 더위를 덜어주며 요나의 비위를 맞춰 주신 주님 아니셨나요? 그런데 왜, 세례자 요한에게는 이리 냉정한지 모를 일입니다. 요한이 죽고 나서 “여인이 낳은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이”라고 칭찬해 주는 것보다 지금, 얼른 수를 써 주는 쪽이 훨씬 낫지 않았을까요? 

두 사람은 똑같이 세상에 회개를 선포했던 예언자입니다. 사실 그분 명령에 따른 충성도나 고난도를 따지면 세례자 요한의 점수가 높을 겁니다. 그런데 이리 홀대하시니, 서른 남짓으로 마감된 그의 삶이 안타깝습니다. 

성경에서 세례자 요한의 갑갑한 심정을 살피게 되니 더욱 그렇습니다. 오죽이나 답답했으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11,3)라고 예수님께 여쭙도록 했을까 싶은 겁니다. 그렇죠. 그는 빈들과 광야에서 지낸 추운 밤을 기억하며 메시아를 위해서 뛰고 뛴 자신의 열정을 주님께서 알아주리라 여겼을 것입니다. 이제 그분이 오셨으니, 자신의 수고를 응당 갚아주실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분이 참으로 “오실 그분”이라면 틀림없이 자신을 구출해 줄 것이라 기대했을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더 가슴 아픕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으십니다. 냉정합니다. 차갑습니다. 잊은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요한을 버리신 듯합니다. 

이 때문에 오늘 복음말씀이 야속합니다. 앞뒤를 뚝 잘라 “요한이 잡힌 뒤에” 대번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고입니다. 이야말로 세례자 요한의 목숨이야 달랑거리든 말든 아무 상관없다는 것 아닙니까? “그동안 수고한 것은 고맙지만 내 일이 더 급하고 소중하니까 이해해 달라!”는 얄미운 태도 아닙니까? 

그럼에도 “왜?”라고 따져 묻지 않고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섭섭해 하지 않았던 세례자 요한의 넉넉함이 놀라울 뿐입니다. 그분께 ‘잊혀지는 일’마저도 기꺼이 수긍했던 그의 인품이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어쩌면 세례자 요한은 “그분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르며, 그분의 길은 인간의 길과 다르다”는 진리를 되뇌이며 내공을 쌓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신발끈을 풀어 드리지도 못하는 존재”라는 걸 기억하며 이를 악물고 버텼을 것도 같습니다. 아무튼 가슴 아립니다. 주님을 위해 헌신한 결과가 허탈합니다. 

주님의 뜻은 헤아릴 수 없이 깊고 넓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장 눈앞의 도움보다 더 귀한 선물을 준비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날 하느님 나라를 위한 세례자 요한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그 길을 이어갈 새 사람을 찾는 일에 골몰하신 것이라 헤아립니다. 그를 “여인이 낳은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이”로 높이기 위한 작업이었음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이기에 정직하고 의로운 삶을 지향하다 문득, 외로워지는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 예수가 죽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힘을 내기 바랍니다. 세례자 요한의 ‘잊혀 짐’과 ‘버림받음’을 기억하여 힘을 얻기 바랍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다”고 증언합니다. 세상의 기쁨도 슬픔도 사라질 것이라 전혀 미련두지 않았던 세례자 요한을 닮으라는 가르침이라 새깁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믿음의 공식은 죽음도 고통도 기쁨도 행복도 모두 그분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일이라는 것, 이보다 귀한 것은 없다는 일깨움이라 헤아립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승리였으며 그분의 자랑이라는 사실을 깊이 간직합니다. 



편집 - 원 근 식 요아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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