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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리 순례길中 마지막 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작성자 : 원요아킴    작성일 : 2011-10-14 조회수 : 7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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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으로 성야고보(산티아고)의 유해가 있는 곳이다.

스페인의 대표적인 바로크 풍 건축양식으로 11세기 말에서 12세기 후반에 건축되었으며 정면
현과에 있는 조각을 보호하기 위해 18세기 중엽에 성당 전체를 새로운 건물로 둘러쌓았다.

이베리아 반도의 북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어 유럽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성 야고보의 묘 때문이다.

9세기 경 발견된 성 야고보의 묘위에 먼저 교회가 지어지고 그 후 여러 차례의 증개축을 통해
대성당이 탄생되었다. 로마네스크 건축의 걸작이기다 한 이 성당의 외관은 16세기보터 17세기
에 걸쳐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되었다.

1985년에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예루살렘 로마에 이은 세계3대 성지순례지로
성지순례를 위한 순례자들의 최종목적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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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ino de santiago(산티아고 가는 길)은 이베리아 반도 동쪽 끝까지 선교하러 왔었고 이 후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한다. 성 야고보의 시신을 그의 두 제자들이 사공도
닻도 없이 돌 배에 태워 바다로 보냈는데 놀랍게도 그 배는 그의 선교지 였던 이베리아 반도
끝 갈라시아 해변 묵시아 에 도착한다.

그 후 그의 시신은 리브레돈 이라는 산에 묻히고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특히 5세기 서고트족과 8세기 이슬람교도들의 침입과 전란을 겪으면서 그의 무덤은
소재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9세기에 수도승 페라요가 별빛을 따라 간 들판에서 한 구의 유골을 발견하게 되고 영주
와 왕으로부터 성 야곱이라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자 이 기적적인 사건은 유럽전역으로
퍼졌다.

그래서 이 곳 지명이 별들의 들판이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에 “campus stella"로 불리다가
후에 콤프스텔라 로 굳어지게 되고, 야곱의 스페인어 이름인 산티아고를 붙여 산티아고 데
콤포스델라 로 지명이 되었다.

성 야곱의 묘가 발견된 시기는 9세기로 이때 스페인에서는 이슬람교도에 대항하는 레콩키스타
운동이 막 시작된 시기로 강대한 적과 싸우기 위한 정신적인 지주가 필요하던 때로 그리스도의
영토에서 발견된 성 야곱의 무덤은 정신적 지주에 어울리는 조건을 지녔다.

또한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의 성지순례 길은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매우 위험했기에
이곳 산티아고로 수많은 이들이 성 야곱의 무덤을 보기위해 몰려들었고 아스투리아스 왕에 의해
성 야곱의 묘는 보호되고 성지와 순례의 길이 갖춰졌다.

12세기에는 5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산티아고 순례 길을 나섰으며 15세기까지 순례 길은 번성
했고 레콩키스타가 진행되면서 이 산티아고 길을 따라 수많은 유적들이 만들어지고 전설들이
탄생했다.

그러다 그 수가 점점 줄어들었고 서서히 잊혀져가고 있던 것이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방문 이후, 프랑스의 국경도시 생장피드포르에서 산티아고로 향하는
프란세스길이 1933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었다.

원래는 성지순례 길이었으나 요즈음은 종교적인 동기로 걷는 사람도 많지만 오히려 정신적인
이유에서 걷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스포츠나 레저로 걷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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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 복남 교수


● ‘별의 들판’ 캄푸스 스텔라



이 도시의 문화유산 요소는 매우 풍부하다. 해마다 600만 명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이
소도시는 9세기부터 속죄를 위해 유럽 각지에서 몰려든 순례자들의 최종 목적지로서 로마,
예루살렘과 함께 세계 3대 기독교 성지 중 하나였다. 오늘날에도 프랑스의 루르드, 포르투갈의
파티마와 더불어 세계 3대 가톨릭 순례지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서 그 옛날처럼 걸어서 순례
행로를 일주하며 기도드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로마제국의 속주인 히스파니아에서 포교하다가 별 소득 없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순교한
사도 성 야곱의 무덤을 9세기 초 수도승 페라요가 이곳에서 발견했다는 소식이 전 유럽에
퍼지자 수 세기 동안 수 백 만 명의 순례자가 순례 행로를 따라 이 소도시를 물밀듯이 오갔다.
별 하나가 사도 요한의 형제이자 에스파니아의 수호성인인 야곱이 묻힌 장소를 계시했다는
속설에서 ‘별의 들판’, 즉 캄푸스 스텔라라는 지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당시 갈리시아 지방은
이슬람 세계와 접하고 있었으며 아랍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국토 회복운동인 ‘레 콩키스타’
의 열기가 충만했던 고장이었다.

무덤 발견 이후 성 야곱을 봉헌하기 위한 성당이 지어졌으며, 대성당은 1078년 착공돼 1128년
경에 완성됐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유서 깊고 아름다운 대성당에는 장인 마테오의 작품
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의 최고 걸 작품으로 통하는 ‘영광의 문’이 있다. 이 건물의 주요부는
11∼12세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이나, 여러 시대에 걸쳐 증축과 개축이 계속돼 현재는 대체로
바로크 양식이 지배적이다.

성당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는 저택과 궁전, 순례자를 위한 여인숙, 환전상 등이 점차 들어서게
됐다. 중세 학생 기숙사인 오브라도이로 광장의 산 헤로니모 수도원은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의
파사드를 함께 갖춘 건축물이며 바로크 양식의 왕립병원은 현재 국영호텔로 쓰이고 있다.
이밖에도 대학, 주교관을 주요 건축기념물로 들 수 있으며 순례와 관련한 수공업도 발전했던
도시였다.



● 성 야곱 무덤 찾는 ‘순례의 길’


중세에 순례자들은 떠나기 전에 고향에서 성대한 환송잔치를 치렀다. 그만큼 귀향을 기약하기
어려운 힘든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순례자에 걸 맞는 행색도 갖추었는데 거친 모직물로 된
망토와 차양이 넓은 모자, 양식 주머니와 순례자라는 신분표지로서 조개껍질 가리비를 몸에
달았다. 순례를 완수한 후에는 ‘콤포스텔라’라는 증서를 받았으며 이것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했다.

유럽 전 지역에서 프랑스를 거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길은 네 갈래가 있었다.
이 길들은 나바르 지방의 팜플로와 푸엔테 라 레나에서 합류했다. 유럽에서 당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다니던 이 순례 행로 주변에 순례자들은 손수 석재를 날라 성당을 지었으며 이때에
여러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와 고딕식 수도원이 세워졌다. 또한 지방 제후들은 무료 병원과
숙박시설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렇게 문화와 종교 중심지가 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갈리시아 북부지방에 번영과 부를
가져다주었다.
순례 행로는 신교 개혁으로 순례의 열기가 시들기까지 이후 8세기 동안 전 세계 기독교 공동
체의 일체감 조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순례 행로에 남겨진 순례자들의 족적은 무수하다.
이 길은 문화 교류의 길, 로마네스크 예술과 순례의 길이었고 노상에서 무훈시와 전설이 만들
어진 문학의 길이기도 했으며, 군사와 교역의 길이 되기도 했다.

오늘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도시 전체는 하나의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순례자가 북적였던
거리는 다양한 양식의 미려한 옛 건축물들이 현대적인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유명 가수들의 콘서트도 열린다. 유서 깊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학은 옥스퍼드, 볼로냐,
루벵, 몽펠리에 3대학을 위시한 중세에 개교한 유럽 대학들과 네트워크를 구성해 풍부한 대학
유산을 발현하는 작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과거 역사 유적지라는 한정된 기능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 이미지가 더해진 이 도시에는
호텔의 신축과 증하개축, 주변 자연환경을 활용한 여가 시설의 설치, 육로와 해로를 통한
교통수단을 개발하는 등의 도시 하부구조의 확충을 통한 발전이 이룩됐다.

어디 이뿐인가. 호텔 경영기술 정보와 전문지식, 지역의 고유한 특미(特味) 개발, 여행안내와
관련된 지식, 지역 전통 습속의 연구 등 정보와 서비스 차원에서 열거하기 어려운 발전의
총화를 기대할 수 있다. 더욱이 유럽 차원의 재정지원이 보장돼 있는 만큼 이 도시의 발전은
보다 가속화돼 지역발전과 경제의 쇄신, 고용의 창출에 걸쳐 직·간접적인 파급효과가
상당할 것이다.
실상 지난 10년 동안 갈리시아 지방의 회의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미국 건축가 피터
아이젠맨이 감독하는 ‘갈리시아 문화도시’(Galicia city of culture)라는 ‘다목적 복합
문화단지’ 건설이 2001년부터 시작됐다. 4년 후 완공되는 이 단지는 70만㎡의 부지에
조성된다.
이 지방의 여행자 수는 1998년 약 282만 명에서 2000년 약 457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이
부문에서 7%의 고용이 증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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