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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2주일/저희가 여기에서/유 광수 신부
작성자 : 원요아킴    작성일 : 2011-03-19 조회수 : 9434
파일첨부 : 88.jpg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나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이는 내가 사랑 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소리가 났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는 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베드로는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과 그 분위기를 보고 너무 행복했었나 보다. 얼마나 좋았으면 뜻하지 않았던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였을까?

그것도 그냥 지내자는 것이 아니라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면 베드로가 얼마나 들떠 있고 흥분하고 있 는 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너무 좋으면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법이다. 그래서 전혀 가능하지 않는 말도 하고 행동도 한다. 아마 지금 베드로가 그런 상태인가 보다. 과연 나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었는가? 내가 지금 여기 서 머물고 지내면 얼마나 좋은가? 라고 말하고 그런 분위기를 접해 본 경험이 있는가?

지난번 1박 2일 피정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많은 자매들이 "신부님, 여기서 며칠 더 지내다 가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우리가 어느 좋은 곳을 가던지 아니면 어떤 좋은 피정을 마치고 나면 "여기서 좀 더 지내다 가면 좋겠다."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나온다.

인간은 누구나 지내고 싶은 곳이 있고, 머물고 싶은 분위기가 있고, 누구와 함께 지내고 싶어 하는 사연이 있다. 아마도 지금 베드로는 자기가 갈망하며 찾고 있던 장소, 사람, 분위기를 발견했기 때문에 가장 행복한 순간을 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곳 즉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장소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의 만남이 바로 천국이 아닐까?

그리고 인간이면 누구나 그것을 갈망하고 있지 않을까? 인간은 누구나 갈망하지만 그런 곳을 그리고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그런 분위기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그리움을 안고 오늘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다.

지금 베드로의 상태는 관상의 상태라고 말 할 수 있다. 황홀한 상태, 주님과의 일치된 상태, 이 세상 것을 잊고 오직 천상의 것에 도취되어 있는 상태, 더 이상 그 무엇이 필요 없는 상태, "주님이 얼마나 좋은지 너희는 보고 맛 들여라."고 말씀하신 대로 주님을 맛보고 있는 상태이다. 우리 모두가 도달해야 할 상태요, 그런 관상적인 삶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이런 행복을 맛볼 수 있을까? 이런 관상적인 상태에 오를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 그 해답이 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만이 가능하다.

관상에 대한 많은 책들이 있다. 그러나 제 경험으로 볼 때 가장 확실한 길은 그리고 가장 빠른 지름 길은 "그의 말을 들어라"는 말씀대로 주님의 말씀을 온 몸으로 들을 때 그런 상태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된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관상 상태에 오르는 것은 나의 능력으로 되는 것도 아니면 내가 원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이요, 은총이다.

오늘 세 제자들이 관상 상태에 들어간 것은 전혀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그들이 한 것이 있다면 예수 님과 함께 산에 오른 것이 전부였다. 즉 예수님의 말을 듣고 그대로 따랐을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예 수님이 보여 주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생활할 때 제자들이 느꼈고 체험한 관상적인 상태는 예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언제 어디에서 이런 관상적인 맛을 볼 수 있게 될는지는 모른다. 다만 우리가 "그의 말 을 들을 때만이" 예수님이 원하실 때 원하시는 방법으로 우리에게도 황홀한 관상적인 상태에 들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우리도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갔듯이 우리의 영적인 생활의 최고 정상인 관상 상태에 오를 수 있도록 "그의 말을 들을 면서" 높은 산으로 올라가도록 하자.

우리는 매일 매일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 발짝 한 발짝 높은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매일 지상에만 물러 있지 말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는 영적 여정이어야 한다. 높은 산으로 올라가는 그 길은 "그의 말 을 들어라"고 말씀하신 대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생활하는 것이다.

관상 상태에 들어갔을 때의 모습과 분위기를 오늘 복음에서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모습은 빛처럼 하얘졌다.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라는 말씀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외적인 현상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관상적인 상태에 머무는 사람이 느끼는 황홀함과 분위기를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 마디로 관상의 상태를 인간적인 언어로 표현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성 베르나르도는 말씀을 깊이 묵상했을 때 느끼는 감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감미롭게 되새김할 때 내 오장 육부가 충만해지고 내 내면의 세계는 충분한 양분을 취하고, 내 마음은 말씀을 이해하는 빛으로 가득 차고, 내 입은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는 말을 하게 되고, 내 손은 새로운 일을 행한다."

제자들이 느끼는 행복함은 바로 우리가 하늘나라에 서만이 느끼는 행복감이다. 그러나 그 하늘나라 는 우리가 죽은 이후에나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라고 한 것처럼 지금 여기에서도 가능하다. 아니 지금 여기에서 이런 행복감을 맛보아야 한다.

그것은 주위 환경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주위 사람들에게서 오는 것도 아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 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의 말씀을 온 마음과 온 정신으로 온 힘으로 들을 때 가능해진다. 우리가 제 자들이 느끼는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이다. 듣지만 듣는 척만 하기 때 이다. 듣지만 온 몸으로 온 정성으로 온 힘으로 듣지 않기 때문이다.

- 성서를 읽을 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대가 읽을 때에는 그대의 인격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열려 있어야 한다. 그대는 온통 눈이 되어야 하고 온통 귀가 되어야 한다.

영성적이라 할 수 있는 그대 존재의 모든 모공(毛孔)이 열려 있어야 한다. 온 대양을 흡수하기 위해서 열려 있는 스펀지의 모공처럼 말이다.

마치 깊디깊은 바다 속 같은 성경의 심연 속에서 동시에 그대 존재의 깊은 심층에서 그대 활짝 피어나라. 바로 거기서 심연 속에 있는 하느님의 이 경이로움 들을 관조하라.

에파타! (너를 열어라) 그러므로 그대는 영적 감각의 모든 것을 열어라. 눈을 열어라: 거룩한 책은 빛난 다. 귀를 열어라: 거룩한 책은 음악이다. 입을 열어라 : 거룩한 책은 생명수다."

-유 광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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